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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is FLUXUS?

일상,그리고 맥주 한 잔 2008. 1. 6. 19:28
“자정을 알리는 괘종시계의 소리. 그리고 소음이 아닌 타이핑으로 이루어진 잠깐의 리듬. 추운 겨울을 알리는 차가운 바람이 창문을 통해서 들어오는 느낌과 가벼움. 그리고 드문드문 보일러가 세차게 돌아가는 소리가 우리 귓전을 맴돌게 한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잠시 귀를 기울여보라. 인내심이 허락한다면 4분 33초 동안. 자.” 존 케이지의 이야기가 끝나자 시계가 째깍째깍 소리를 내는 동안 시침을 바라본 이들은 그 유명한 존 케이지의 ‘4분 33초’란 음악 연주를 감상했다라는 멘트음이 슬며시 흘러나왔다. 1952년, 뉴욕에서 존 케이지(John Cage)는 피아노 앞에 가만히 앉아 4분 33초 동안의 청중의 웅성거림이 바로 음악이라 소개했다.

재미있게도 존 케이지라는 단어를 검색창에 올려놓으면 비디오 아티스트로 널리 알려진 백남준이라는 이름도 동시에 올라온다. 그렇다면 플럭서스는 비단 음악만으로 한정된 장르가 아니라는 것일까. 바로 이 둘의 공통분모로 연관 검색되는 단어인 ‘플럭서스(FLUXUS)’란 흐름에 따른 끊임없는 변화, 움직임을 뜻하는 라틴어로 1960년부터 1970년대에 걸쳐 일어난 국제적 전위예술운동을 지칭한다.

플럭서스(FLUXUS) definition. definition?

사실 플럭서스는 '변화', '움직임', '흐름'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한다. 그리고 그것은 1960년대에 번성한 ‘복합 매체(intermedia)’ 예술운동으로, 특히 퍼포먼스, 영화, 극적으로는 비디오 영역에서 여러 가지 혁신을 꾀하였다. 이 용어는 1961년 뉴욕의 갤러리 A/G에서 행한 일련의 강연회를 알리는 초청장 문구에서 조지 매키우너스(Maciunas)가 처음 사용했으며 특정 양식이라기보다는 마음의 상태에 가깝다. 제도권 예술의 억압과 몇몇 낡은 기존 범주들에 반기를 든 것이라 하나의 틀 안에 제한되지 않음을 주된 특징으로 삼고 있는 것도 하나의 특징. 또한 단순한 예술과 연관 짓기보다는 포괄적인 범위로 해석하는 것이 플럭서스를 이해하는 정의 아닌 정의 중 하나라고 한 켠에 새겨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개념으로서 예술이라는 관념으로 무장하고 삶과 예술에서 ‘우연’의 역할을 중요하게 여긴 예술가들은 플럭서스로 대표되는 운동들로 창조성을 폭발시켰다.

'삶과 예술의 조화'를 기치로 내걸고 출발한 플럭서스 운동은 이후 베를린·뒤셀도르프 등 독일의 주요 도시들과 뉴욕·파리·런던·스톡홀름·프라하·일본 등 유럽·미국·아시아 등지로 빠르게 파급되어 전 세계에서 거의 동시에 나타났다. 이는 플럭서스 작가들이 여행과 서신 교환 등을 통한 교류가 가능했기 때문인데, 그들은 엽서 형태의 콜라주나 소규모 작품을 우편을 통한 상호 교류, 즉 우편미술(메일아트)을 통해 교류의 폭을 넓혀 갔다.

사실 1963년 마키우나스가 뉴욕에 플럭서스 본부를 창설하고, 이듬해에 히긴스(Dick Higgins)가 《섬싱 엘스 프레스 Something Else Press》를 설립할 무렵인 1974년까지 플럭서스와 관련된 주요 서적들을 출간하는 활동을 펼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 시기를 전후해 플럭서스 운동은 전성기를 맞았다. 특히 플럭서스는 처음에는 미술에서 출발하였으나, 곧 예술의 어느 한 장르에 국한되지 않고 콘서트·이벤트·출판물·선언문 등에서 공통적으로 사용되면서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탈(脫)장르적인 예술운동으로 발전하였다. 표현 형식에서는 처음에는 다양한 재료를 혼합해 많은 미술 형식을 동시에 표현함으로써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희화적이고 개방적인 경향을 보였다. 즉 초기 이벤트들은 주로 극적인 요소 위주로 작품 활동이 이루어졌는데, 갈수록 이러한 요소들은 줄어들고 대신 구체적이고 시공간을 강조하는 개인적 경향으로 바뀌었다.

결국 플럭서스는 1960년대에 번성한 ‘복합 매체(intermedia)’ 예술운동으로, 특히 퍼포먼스, 영화, 극적으로는 비디오 영역에서 여러 가지 혁신을 꾀하였다. 기존 방식의 답습이 아닌 새로운 움직임, 60년대 곳곳의 예술가들 사이에서 동시에 일어났던 플럭서스 운동은 지금에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자유로운 흐름이 우리 마음속에 생기고, 그 흐름이 큰 물결이 될 때 또 다른 시각, 보이지 않았던 세계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플럭서스의 ‘일부’이다. 플럭서스는 굉장히 통합적인 예술 개념을 탄생시켰고, 후에 우편미술, 개념미술, 포스트 모더니즘, 행위예술 등 현대적 예술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존 케이지-4분 33초


플럭서스(FLUXUS) 영향의 필요충분조건.

플럭서스 운동은 음악과 시각예술, 무대예술과 시 등 다양한 예술 형식을 융합한 통합적인 예술 개념을 탄생시켰으며, 메일아트·개념미술·포스트모더니즘·행위예술 등 현대 예술 사조를 직접 탄생시키기거나 여러 예술 운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대표적인 플럭서스 예술가로는 마키우나스·히긴스·케이지(John Cage)를 제외하더라도 보이스(Joseph Beuys)·블록(Rene Block)·무어맨(Charlotte Moorman)·존슨(Ray Johnson)·백남준(白南準) 등이 있다.

앞서 잠깐 언급했지만 플럭서스 작가들은 즉흥적이거나 기획된, 개인 혹은 그룹 이벤트를 통해 음악과 연극 공연에 대한 관중들의 고정관념에 도전했다. 그렇기 때문에 극장과 콘서트홀 등 비교적 전통적인 공간뿐만 아니라 헛간, 교실, 갤러리 등 비전통적인 공간에서도 플럭서스 예술은 행해졌다. 플럭서스 멤버 딕 히긴스는 "플럭서스는 운동 역사의 순간, 조직이 아니다. 플럭서스는 아이디어, 일종의 작품, 경향, 사는 방법이자 플럭서스 작품 활동을 하여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람들이다."라고 그것을 말하고자 했다. 덧붙여 아방가르드 운동 플럭서스는 반 예술이었으며, 특히 미술관과 수집가의 독점적인 소유물이 되는 예술에 대한 ‘반 예술’이었다고 그와 뜻을 같이 하는 이들은 정의한다. 플럭서스는 무엇보다 인생과 생활에 직결되는 삶의 예술을 지향한다. 예술을 관념주의와 형식주의의 허구로 부터 구제하기 위하여 관념보다는 행위로, 형식보다는 내용을 택하고 그럼으로써 예술을 "인생의 모든 양상을 드러내는 마술의 거울"로 만든다. 이와 같이 다다정신에 가장 근접한 급진적이고 실험적인 플럭서스는 백남준에게 해프닝의 무대였을 뿐만 아니라, 비디오 아트를 탄생시키는 모체가 되었다.

플럭서스(FLUXUS) is 인터렉티브(interactive).

플럭서스는 즉흥을 기반으로 하는 ‘해프닝(Happening)’과 같은 맥락으로 간주되지만 보다 유머러스하고 개방적인 경향을 특징으로 한다. 플럭서스의 구성원들이 벌인 행사에서 이들은 반음악적, 반시적인 것, 비예술적인 것을 추구하고 있으며, 특히 연극이나 음악에서 대중을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상호호환성을 지닌 '인터렉티브(interactive)'함을 지녔다. 일반적인 시선으로 바라봤을 때 콘서트에서 도끼로 피아노를 부수고, 관객의 넥타이를 자르는 것은 물론 피가 뚝뚝 흐르는 소머리를 극장 문에 걸기도 하지만 실상 이런 것들과 관객들 간에 호환이 이루어진다면 멋진 작품이 된다는 논리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런 장면은 백남준이 타계했던 시절 장례식에서는 조문객들이 서로의 넥타이를 자르는 퍼포먼스에서도 나타나기도 했었다. “넥타이는 맬 뿐만 아니라 자를 수도 있으며, 피아노는 연주뿐만 아니라 두들겨 부술 수도 있다”라는 그들의 주장이 바로 장례식장에서 행해진 것. 관객의 넥타이를 자르고 피아노를 때려 부수었던 백남준의 퍼포먼스를 조용한 장례식장과 다른 플럭서스로 다가가 재현한 것이다.

백남준. 수열. 플럭서스.(FLUXUS)

사실 백남준은 생존해있는 동안 플럭서스에 점차 극단적 에로티시즘의 도입 하게 되는데 1965년 <성인만을 위한 첼로 소나타 제1번 Cell sonata no1 for adults only>은 백남준/무어맨 콤비의 역량을 과시한 에로티카의 효시적 작품으로 꼽힌다. 무어맨이 바하의 <첼로 조곡 3번 Suite for cello>을 연주하며 거의 누드가 될 때까지 연주와 옷 벗기를 계속한 것이다. 이러한 극심한 에로티시즘은 플럭서스가 다다에 음악을 도입한 것과 마찬가지로 백남준은 다다음악에 누드를 도입된 것이다. 여기서 백남준의 제시하는 누드로 이상화된 아름다움을 표출하는 고전적 누드도 아니고 상징적 알레고리도 아닌 성의 담백한 전시일 뿐이다. 다시 말해 백남준에게 에로티스즘은 관객참여를 유발하는 자극제인 동시에 관객에게 직접 호소하는 촉매제로 작용하려 했던 것이다.

이러한 해프닝은 플럭서스 후기에 가면 비디오 아트의 영역으로 이전되면서 한 차원 진전된 복합매체 공연으로 발전한다. 1969년 <살아있는 조각을 위한 TV브라 Bra for living sculpture>에서 무어맨은 맨 가슴에 TV 모니터를 속옷으로 입고 첼로를 연주한다. 같은 해 TV에서는 무어맨이 3개의 모니터로 된 TV첼로를 연주한다. 여기서 백남준은 여인의 몸을 기계로 옷을 입히고 악기를 기계로 대치하여 인간에 따라서 시각적요소와 청각적 요소, 기술과 예술, 예술과 현실의 복수적 병합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백남준은 이를 통해 그의 참여예술을 성취한 것이다. 플럭서스를 잘 이해하기 힘든 이유는 이러한 작품의 불규칙성들 때문에 이것이 플럭서스다 라고 제한하거나 정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덧붙여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게 작품이야 라고 의문을 갖기도 한다는 점도 플럭서스가 견제되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요코 요노-자르기


시각. 요코 요노.

존 레논의 연인으로 알려진 요코 요노도 플럭서스 문화에 한 축을 담당했다. 한 때 비판의 도마위에도 오르기도 했지만 1990년대 중반에 재조명되기 시작한 오노는, 저팬 소사이어티에 의해 조직된 2000년도의 회고전 ‘예스 오노 요코’를 통해 플럭서스의 대표 예술가로 추인되기에 이른다. 개념미술의 숨은 공로자이자, 일본의 전통적 선사상과 하이쿠를 현대예술에 접목시킨 선구자로 재평가되었던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전시에 제시된 그의 대표작은 대개 역사적 가치가 의심스러웠다.

둔부를 촬영한 ‘No. 4(엉덩이들)’(1966)는 벤 보티에의 ‘플럭서스 구멍’(1964)의 아류작이고, ‘워터 피스(물을 줘야 하는 회화)’(1966)는 미에코 시오미의 ‘워터 뮤직’(1964)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백색 체스 세트’(1966)도 다카코 사이토의 작업인 ‘사운드 체스 혹은 무게 체스’(1964)의 후속작 처럼 보이고, ‘하늘 자판기’(1971)도 로버트 와츠의 ‘펜 자판기’(1963)나 ‘우표 자판기’(1963)의 모작처럼 보인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심지어, 실버맨 콜렉션에는 존 레넌과의 공동 작업으로 기록돼있는 ‘세 개의 숟가락’(1976)은, 오노의 개인 작업으로 수정됐다.

그렇다면 오노의 독창적인 면이 드러나는 역작은 뭘까? 플럭서스 퍼포먼스인 ‘자르기’(1964)와 지시문 작업을 책으로 엮은 ‘그레이프프루트’(1964) 정도다. 특히 지시문 작업은, 남편이었던 존 레논이 ‘이매진’(1971)이란 명작을 만드는 데 기여했고, 또 각종 반전 시위와 퍼포먼스로 이어졌으니 미국의 역사에까지 영향을 끼친 셈이다. 하지만 역시 그의 역작은 거짓으로 점철된 그의 인생 자체라고 봐야겠다. 개인의 거짓에 기반 했으나 세계가 공유하는 실제가 됨으로써 ‘아트’와 ‘역사’로 거듭난 인생. 최근엔 빌보드 댄스 차트에서 연이어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최신 히트곡의 제목은 <노, 노, 노>(2007)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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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쿼터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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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감사합니다.^^ 추억이 담긴 이전의 이 글. 그리고 기억나는 댓글 모두 감사드립니다. 블로그를 시간나는대로 관리해야겠네요. 종종 들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