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쿼터메인's mentalgame

난 널 유혹하는 거란다.(3)

빛과 그림자. 2007. 11. 21. 00:36

 2001년부터 프로생활을 시작한 신명철은 2006년 시즌까지 통산 타율 0.233-13홈런-99타점-43도루. 게다가 삼진은 무려 245개나 당했다. 특히 지난 2005년 황태자로 군림하던 시절의 경우에는 무려 79개의 삼진을 기록, 웬만한 타 팀 대형 슬러거보다 더 많은 삼진을 당하는 아픔도 겪었다.

사실 이 쯤 되면 지명 당시 예전을 다시금 돌아보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 신명철의 지명은 타당했지만, 부산, 경남 자원 중에서 신명철의 당해 동기 중에서 분명 눈에 띄는 자원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명철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선수가 꼭 있었다. 1997년 신명철이 롯데에 1차 지명 받을 당시 외야 유망주로 손꼽히고도 신명철에 밀려 고향 팀 롯데에 입단하지 못했던 박한이가 바로 그 주인공. 사실 부산고 시절의 박한이와 마산고 시절의 신명철을 비교하기는 애매하겠지만 박한이가 대학시절에는 이야기가 조금 달라질만큼 출중했었다.

사실 박한이는 신명철과 마찬가지로 동국대 재학 시절 나란히 98년 방콕 아시안게임 야구 드림팀에 발탁될 정도로 훌륭한 선수였을 정도로 미디어에서 연일 주목하는 선수로 내보냈다. 그리고 지금은 대학 때의 신명철이 아닌 지금의 신명철과 비교되기 힘들 정도의 레벨에 올라와 있는 선수로 팬들에게 인지되고 있는 것에는 이견을 달기 힘든 상황이다. 그리고 롯데는 박한이의 미지명으로 엄청난 비난을 감수해야만 했었다.

분명 당시 외야자원이 풍부하다고 생각하던 롯데 입장에서도 당시 신명철에 대한 선택은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고 박한이의 엄청난 성장은 두고두고 후회될만한 선택이었음은 인정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팬들에게 기억되고 있는고 신명철의 부진으로 각인되었는지도 모른다. 박한이는 삼성에 입단해 두 번이나 팀의 우승을 이끌고 붙박이 톱타자로 성장하는 등 해가 거듭될수록 빼어난 기량을 선보이는 반면 신명철은 롯데 팀 내에서도 ‘확고’ 라는 개념이 없이 주전 자리를 꿰차지 못하였다. 그리고 이 둘의 프로에서의 경쟁은 사실상 끝났다고 이야기까지 나왔다. 어찌보면 롯데 팬들에게 이런 부분은 가장 아쉬움으로 크게 남았을 것이다.

테이블 엎어?

당시 롯데에서의 신명철은 팀 내 공격을 연결 고리 역할보다는 끊어내는 역할을 주로 담당하고는 했었다. 테이블 세터라기보다는 테이블을 엎는 담당으로 그의 이름이 자주 거론되었고 롯데에서 신명철은 구세주의 이미지에서 그저 그런 이미지로 전락했음은 물론이었다. 사실 당시 롯데라는 팀 타선에서 당시 제 역할을 하는 선수들은 많지 않았고 그에게 많은 부담이 지워졌다는 부분은 그에게 변명의 꺼리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캡틴 의식이 강했던 그에게 약팀을 어떻게서든지 일으켜야 겠다는 일말의 사명감은 그에게 더 힘든 시간이 되도록 부추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점점 시간이 갈수록 그가 어깨를 펴고 다닐 수 있는 시간은 줄어들었고, 이대호가 몰아치기 시작한 것이 조금 더 빨랐다면 이라는 팬들의 가정은 말 그대로 가정만 될 뿐으로 남게 되었다. 아쉬움만 남을 뿐이었다.

물론 그는 정신력을 제외하면 사실 롯데에서도 2006년을 제외하면 실질적 주전으로 손꼽히기도 힘들었다. 사실 그 부분 때문에 소위 말하는 ‘까임 방지권’을 얻어내기 조차도 힘들었었다. 그리고 일부 팬들이 갖고 있는 그의 기대치 때문에 주전이라고 생각했던 것뿐이지 실질적 2루 주전 자리는 박정태 이후에 갑자기 튀어나온 조성환이었다. 그렇게 2003년으로 기억되는 백인천 감독 시절 조성환은 소위 신명철보다 잘나가던 선수로 기억되었다. 그 때문에 당시 국가대표 단골 멤버이자 자존심과 자부심 강한 신명철이 바랄 수 있는 것은 단순하면서도 기적과 같은 운 이었을지도 모른다. 신명철에게 입단 당시 박정태 이름 석 자만 생각하고 살다가 조성환이라는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르는 산이자 벽이 버티고 있던 것은 정말 예상 안 되던 상황이었다.



게다가 조성환은 신명철과 달리, 유격수, 2루수, 3루수 등 모든 포지션에서 부족하지만 분명 경쟁력을 보여주기까지 했다. 자이언츠 팬들이 바라던 근성이 뒷받침된 ‘눈에 보이는 허슬 플레이’ 능력까지 갖춘 매력적인 선수였다. 신명철이 해결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던 톱타자의 조건 역시 그는 갖추고 있었다. 자. 이쯤 되면 신명철의 입지는 정말 온데 간데 사라지게 될 처지에 자리하게 된 것이었다. 더욱 신명철이 노력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눈에 보이는 실력이 안 되는 허슬 플레이는 사실 팬들의 눈에 들어오기 보다는 눈밖에 나버리는 역효과까지 가져왔다. 그가 롯데에서 얼마나 안 풀렸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슬라이딩해도 욕을 먹고, 번트를 대도 혼이 났다. 기대치가 이제는 화살로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신인 시절에는 호쾌하다는 그 스윙은 대형 선풍기라는 이름으로 절전을 당부하는 팬들까지 생기게 되었다. 선풍기는 집에서만 틀어야 하는 상황이 온 것이 아닌가 싶었다.

조성환.

사실 조성환은 롯데의 어느 선수가 그를 표현할 때 정말 쇠라도 씹어 먹으라면 먹는 선수라고 표현했던 예전 인터뷰처럼 그는 근성의 순수 결정체라고 할 만큼의 모습을 단적으로 표현해주는 선수에 해당된다. 팔이 부러져도 그라운드에서 뛸 선수로 당시 팀에서는 조성환을 꼽았고 선수들의 구심점으로 조성환의 이름은 항상 거론되었다. 찬밥과 쉰밥까지 먹은 만큼 선수들의 입장을 그만큼 이해할 수 있고, 목표의식이 누구보다 또렷하다는 조성환. 어찌 보면 신명철과 다른 비 엘리트 코스, 비포장도로만 골라서 밟아온 선수가 조성환이었다. 2차 말번에 지명되어 언제 방출될지 모르던 선수가 그 때부터 이미 청대, 국대 출신의 최고 유망주를 제치는 순간이 오리라 생각하지 못했지만 눈앞에서 벌어질 것이라고는 사실 예상이 안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신명철이 밀리면 그의 자존심도 이제는 뭉개질 만큼 뭉개질 법하다. 그러나 신명철의 자존심이 어떠했는지 와는 상관없이 그리고 이 둘의 격차는 점점 벌어지기 시작했고 일부 언론과 몇몇 팬들은 둘을 기다렸다는 듯이 더욱 비교하며 부추기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이 단순히 실력과 무관한 기회라고 하더라도 신명철과 조성환은 격차는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어찌 보면 신명철에게는 박정태만한 산을 하나 더 만난 것이었다.(지금도 조성환을 언론 상에 이상구 단장이 제대 후 가장 기대가 되는 타자라고 언론에서 밝힌 바 있을 정도로 팀 내에서 입지와 신임 또한 굉장히 두터울 정도로 입지가 탄탄하다.)

물론 신명철에게 여기까지가 롯데 생활의 끝은 아니었고 조성환에게도 항상 가속 페달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모든 상황에서 기회가 한 번쯤은 주어지듯 신명철에게도 분명 기회가 있었던 것이다. 최소한 불의의 부상만 당하지 않았다면 그 기회가 오래갔었겠지만 분명히 기회는 있었다. 그 기회는 다름 아닌 조성환이 세간의 주목을 받을 무렵 그가 뜻밖에 부상을 당하는 일을 겪게 된 것. 정수근과 더불어서 1,2번 타자로 타 팀의 경계대상으로 주목 받을만한 시점에서의 부상이었기에 이 부상은 팀 내 치명적인 마이너스로 작용할 것이라고 예견되었었다. 자연히 기회가 신명철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2군에서 좋은 성적을 보여주던 신명철이 콜업 된 것이었다. 정말 올 것 같지 않았던 기회가 또 오게 되었다. 그러나 팬들은 이제 그러려니 라는 심정으로 바라보면서 부상당한 조성환을 안쓰럽게 돌아보게 되었다. 더 이상 덥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운이 좋았던 것일까 아니면 정말 이 때만큼은 실력이었던 것인가. 신명철이 올라왔다는 뉴스 끝의 짤막한 단신으로 시작한 신명철의 1군 복귀는 바로 그 다음날부터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한다. 정말 예상 밖으로 롯데에 입단 후 최고의 활약을 당시에 보여주게 된 것이다. 물론 그 기간이 너무 짧았다는 것은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신명철이 그라운드에서 보여주는 세레머니와 파이팅은 대단했다. 물론 그 파이팅이 너무 대단했다는 것이 문제가 될지는 몰랐지만, 우선은 열심히 그라운드를 누볐다.

그리고 딱 거기까지였다. 그라운드를 누볐다 이후에 그의 활약은 사실 없었다. 아니 있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신명철은 물 오른 타격감과 팀에서의 수비 조율에 일임했지만 그 해 롯데 2루수 부상징크스를 역시 벗어나지 못하며 손목인대가 늘어나는 부상을 당했던 것이다. 사실 그 해 롯데 2루수는 줄줄이 부상을 당했다. ‘비운의 유망주로 결국 남을 것인가’라는 기사가 다시 한 번 가판대의 아침을 장식했고 이제는 정말 고사라도 지내야 하는 심정이었다. 그리고 그의 2003년 한해가 끝이 났다. 신명철을 두고 한 스포츠 신문에서는 우스갯소리로 그가 사는 집터를 의심해보거나 사주를 보러 달려가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이런 이야기가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도 않았고, 매해를 새로운 기분으로 시작했다. 사실 그런 부분이 없었다면 버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2004년은 신명철에게 조금 남다른 한해로 기억되었고 그렇게 만들어가려고 했었다. 당시 부임한 양상문 당시 엘지 투수코치가 2004년 부임하게 되면서 팀의 중심으로 신명철과 이대호를 지목하는 일까지 생겼다. 양상문 감독도 신명철의 자질을 인정했었고, 신명철 또한 다시 한 번 해보자는 심정이었기 때문에 팬들은 다시 그를 재조명하게 되었던 것은 당연했다. 정말 기뻤다.

3루 또한 팀의 약점이라, 3루로도 출전하고, 유격수로 가끔 백업으로 출전도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제는 죽기 아니면 까무라 치기였다. 물론 때로는 타격이 살지 않다보니, 수비 밸런스 또한 확연히 무너져서 수비자세가 높아지며 어이없는 에러를 저지르는 경우도 눈에 띄고는 했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무너지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마지막 기회 같았기 때문이다. 다시 달렸다. 그냥 달렸다.

<사진-Photoro.com, 롯데 자이언츠,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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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쿼터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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