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쿼터메인's mentalgame

슈퍼스타 박철순.(4)

별을 쏘다. 2007. 12. 25. 10:02

1986년 5월 박철순은 롯데 자이언츠 전에서 완봉승을 거두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 게임은 나름대로 ‘바로 그에게 그리고 팬들에게’ 큰 의미를 부여 하였다. 그가 거의 부상 이후 4년 만에 거둔 완봉승. 많은 투수들이 부상과 동시에 컴백이라는 부담스러운 스포트라이트 속에 복귀를 하곤 하지만 박철순이 멋지게 팬들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선물하는 순간이었다.

수 없이 복귀하는 많은 투수들. 그리고 그 선수 중에서 뛰고 있던 21번의 사내. 자신이 자신을 이기기 위한 검증 무대에서 무너지는 투수들 또한 우리는 보게 되기도 했었지만 차이점은 박철순은 말 그대로 달랐다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이 게임은 야구 선수들이 회자할만한 말 그대로 전율이 흐르는 게임이었을 정도로 박철순 그가 살아있음을 알게 해주는 게임이었다.

이 날 잠실구장에서는 그의 당시 게임을 기념하기 위해서 그리고 박철순을 위해서 프랭크 시나트라의 '마이 웨이'가 울려퍼졌다. 그가 이 날의 흥분과 분위기 속에 끝내 눈물을 쏟아버렸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당시 순간은 팬들에게 추억의 앨범을 뒤적여 보면 적잖이 어필이 될 만한 특별한 게임이었다. 촛불의 촛농이 녹아떨어지면서 심지가 타들어가고 묻혀가면서 불이 꺼졌다 밝아졌다가를 반복하는 동안에도 버티던 그였다. 그랬기 때문에 그 날은 박철순 그 자신이 스스로 거의 마지막으로 열을 뿜어내며 마지막 자신의 가치를 다하기 위해 심지의 마지막에 마운드에 박철순은 올랐을 것이다. 팬들 역시 모를 리 없었다.

경기가 끝나며 전광판의 스코어보드가 멈추었을 당시 녹색의 그라운드의 테를 두르듯이 그를 지켜보던 많은 팬들은 함성과 눈물을 동시에 보였다. 이미 선수 생명은 끝났다는 소리를 들은 뒤, 혹독한 재활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친다는 것조차 어려웠던 상황. 그 상황에서 한발 더 나간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악물고 복귀했다는 사실 그것만으로도 그는 신화적인 존재처럼 보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신화라는 단어와 가장 잘 어울리는 ‘불사조’라는 별명이 어울릴 수밖에 없었고 팬들이 그를 사랑하는 것 이상으로 다가가는 이유가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팬들이 불러주는 불사조란 별칭은 그만의 고유명사처럼 앞으로도 불릴 수 있는 이유가 되어 버렸다. 피곤한 모습으로 하교를 할 무렵 언젠가 그가 내게 했던 말. “나는 영원하지 않을 수 있지만, 팬들과 야구는 영원하다.” 그가 자주 말하지는 않더라도 정말 미치도록 그리워하는 것이 야구라는 것은 이 쯤 되면 눈치가 느린 나 또한 모르는 것이 이상했다.

독기와 목표.

‘부상과 함께 자취를 감춰버린 박철순’, ‘재활이 더딘 과정 속에 복귀 미정’ 복귀가 힘들다는 전망까지 나올 정도로 팬들의 기억 속에 원년의 박철순을 되새기기란 어려웠고, 결국 기억을 흐리게까지 했었다. 너무 운이 없을 정도의 잦은 부상은 그가 팬들에게 슈퍼스타로서 달려가고 유지하고 싶은 희망의 길에 항상 장애가 되어버렸다. 철저한 식이요법과 물리치료로 극복을 하면서도 복귀한 무대에서 이어지는 부상들. 베어스 팬들이나 그에게 아마 당시는 정말 잊고 싶었던 시간이었을 것이다.

롯데 자이언츠의 어떤 2루수가 입단을 해도, 한 때 부상으로 신음하던 박정태로 팬들이 못을 박았던 때처럼, 타이거즈 선발진 명단에 대기자 이대진의 이름이 먼지가 쌓여갈 때 그들의 공백의 자리를 항상 생각했던 것처럼. 아마 베어스 팬들에게 수많은 에이스 중에서 가장 먼저 떠올릴만한 투수로 박철순은 쓰러지지 않고 기댈 수 있는 플라타나스 나무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물론 그런 그가 돌아와도 팀이 다시 우승하기까지 너무나 오랜 시간이 또 흘러야만 했었지만 최소한 그 자신은 팀 내 구심점이자 목표가 되었다.

수많은 곰들이 무슨 강력한 주문에 봉인되듯 '오비꼴찌‘라는 상대팀의 구호 아래 잠들기도 했지만 불사조는 8개 팀이 버티고 있는 정글에서 비상해야만 했었다. 많은 언론에서 그의 마지막 무대를 섣불리 단정하기도 했었고, 코칭스탭진들의 많은 교체와 팀의 전폭적인 개선이 있기까지 팬들도 베어스가 어느 방향으로 나갈 것인지 갈피를 못 잡는 듯 했지만 목표는 있었다. 최소한 그의 머릿속에는 그랬다. 그의 선수로서 팬들과 함께 하는 마지막 우승.



‘정말’ 마지막 로진백. 

그리고 그는 정말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어느 날. ‘그 때’를 회상하듯 그는 마운드에서 공을 여전히 뿌리고 있었다. 원년의 우승과 이제 펼쳐질 우승을 위해서. 그리고 박철순은 당시 원년 이후 처음으로 13년 만에 그는 한국 시리즈 5차전에 단 한번 등판하였다. 머리는 과거보다 더 많이 빠진 듯 했고 몸은 지쳐보였지만 미소는 잃지 않았다. 시즌 막바지. 축제이자 최후의 결투장으로 가기 위한 말 그대로 가을잔치로 불리는 플레이오프.

한국시리즈에서 일반 고참급 선수처럼 노련미까지 그에게 바라기보다는 팀은 그가 체력이 고갈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바로 그 상황에서 팬들은 그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을지도 모른다. 이 때 잠실구장 관중들은 기립박수로 당신을 맞이했었다. 가슴으로 야구를 하던 20대 청년은 머리털이 숭숭 빠지고 눈가엔 잔주름이 깊게 패인 40의 장년이 되어, 13년 전 그날처럼 글러브를 쥐고 젊은 날처럼 공을 뿌렸지만 그를 정말 사랑했다. 말 그대로 혼을 실어서 던지는 그의 발목이 되길 바랬다. 쓰러지지만 않길 바랬다.

1995년 박철순은 82년 이후 최고의 성적인 9승. 아홉수라는 말이 있다고 하지만, 사실 그에게 아홉수라는 것은 의미 없는 숫자에 불과했었다. 수많은 지옥 같은 시간들을 그는 항상 활화산을 맴도는 불사조처럼 수많은 어둠의 봉인의 긴터널을 뚫고 지나왔다. 그리고 그 시간들은 그를 기다림과 시간으로부터 초월하게 만들었다. 말 그대로 죽지 않는 근성과 오기, 독기, 투지를 더 다듬어서 말 그대로 자신의 몸이 안 되면 팀 동료를 자극시키는 에너지로 팀 전체를 일으키기 위한 보탬이 되고 싶었고 그랬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그는 마운드에서 자신이 공이 되어 미트에 꽂혔다. 그게 바로 그가 말하는 ‘혼(魂)’이었다.

비록 그가 5차전을 제외하고는 한국시리즈에선 벤치만 지켰지만 팀에 존재한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선수들은 목표와 구심점이 생기게 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까지 들었던 것이 당시. 당시 우리나이로 40인 박철순은 후반기에 들어선 체력이 거의 바닥나 한국시리즈처럼 팽팽한 경기에 나설 상황이 아니었다는 기사도 눈에 들어왔지만 팬들에게는 박철순이었지 노장 투수가 아니었다. 그러나 박철순은 팀 투수진이 모두 바닥난 5차전 중반 중간계투로 마운드에 나섰지만 그것은 그의 중요한 보직이자 팬들의 염원이었다.



밤하늘을 수놓는 별들.

1995년도 한국시리즈는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한국시리즈 중 하나로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게임을 보면서 고민을 하는(?) 시리즈였던 것으로 기억을 한다. 자이언츠 광팬이었고, 마해영, 전준호, 공필성 등 혼을 실은 야구를 보여주었던 롯데의 모습은 언제나 내가 외면하기 힘든 매력을 지녔었기에 당연히 롯데의 우승을 바랬다. 그리고 롯데 입장에서도 이번에 우승함으로 인해서 강팀으로 나아가는 교두보로 삼을 수 있는 해로 가져갈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당시 자이언츠의 우승 적기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를 응원했었다.

  특히 이 시리즈 자체는 끝까지 손에 땀을 쥐게 했던 것으로도 기억에 남는다. 9회 초 롯데의 마지막 공격에서는 임수혁과 그 날 몸에 맞는 공으로 두 번이나 출루했던 당해 최고 데드볼왕(?) 공필성이 투지를 불사르는 안타를 연이어 터뜨리며 루상의 주자를 1, 2루로 만들기까지 했던 부분은 팬들을 끝까지 자리를 떠나지 못하게 했었다. 투아웃까지 간 상황에서 다들 일어나서 집에 가려는 동작을 취했을 때 삽시간에 벌어진 이 안타들. 그리고 이어지는 패스트볼로 2사 2, 3루. 끝나기 전까지 그렇게 계속 사건은 이어졌었다. 김인식 감독도 긴장했고, 유격수를 보던 김민호를 비롯한 야수 진들도 끝까지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집에 가려던 잠실의 3루측 롯데 응원석은 술렁이기 시작했던 것은 당연했고, 베어스의 투수코치였던 최일언씨는 마운드에 올라와 권명철을 다독였다. 그러나 마운드에 서 있는 권명철은 생각만큼 초조하지도 않았던 듯이 혼자서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8회 말까지 4대 2의 스코어. 안타 하나면 동점이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아웃카운트 하나만 잡으면 여기서 게임은 끝이었다. 그리고 김용희 롯데 감독은 대타를 내세운다. 바로 원광대 출신으로 힘 좋다고 소문났던 손동일. 그러나 손동일의 타석은 그의 선수 커리어보다 더 짧게 느껴질 정도로 짧은 타석을 마치게 되고 말았다. 말 그대로 끝내기 내야 땅볼. OB의 우승이었다. 정말 기다리고 기다리던 우승이었다. 김인식 감독이 웃었다. 결국 8회 말까지 스코어로 9회까지 마무리 지어지던 것이었다.

우승을 확정지은 순간 롯데의 팬들은 쓸쓸히 구장을 빠져나갔고, 베어스의 팬들은 그 순간을 기쁨과 눈물로 그라운드를 메웠다.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은 우승이었기 때문이었다. 베어스 선수들은 김인식 감독을 헹가래 치기 시작했고, 최고참 선수인 박철순은 후배 선수들에게 무동을 탄 채 야구장을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은 짧게는 지난해 항명 사태라는 안타까운 불운을 씻어내는 흥분이었고 길게는 1982년 우승의 다음 장을 써 내리는 13년 베어스 역사의 한 획이었다. 경기가 끝날 무렵 카메라는 당시 최고의 스타 플레이어였던 김상호, 김상진이 아니라 두 줄기 눈물을 줄줄 흘리는 박철순을 비추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동료였던 황태환, 계형철, 선우대영, 박상열 등 원년 투수들은 당시에 한 명도 남지 않았다. 그라운드를 지배해버린 선수들과 팬들. 모든 이들이 박철순과 같이 울었다. 당시 어린 학생이었던 내 자신도 당시 너무 많이 울어서 그 이후로 개인적으로 1995년 한국시리즈 게임을 한동안 돌려보지 않았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눈물을 보이는 동안 유난히 빛나던 하나의 별은 이제 빛을 일어가는 시간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별의 수명이 다 했기 때문이었다.

게임이 진행되는 동안 롯데가 한 게임이기면 박철순이 있던 베어스가 밟혔고, 베어스가 이기면 이상하게 롯데가 밟혔던 시리즈가 바로 그 게임들이었다. 롯데가 우승을 못하면 한 동안 밥이 안 넘어갈 것만 같았던 시즌 초와 어느 순간부터 바보같이(?) 당시 베어스를 응원했던 시절. 야구는 즐기면서 봐야한다는 것이 지금 철학이지만, 당시는 이겨도 고민이 되었고, 져도 고민이 되었던 바로 그 때. 잠실에 게임을 보러 갈 때마다 내가 응원하던 롯데를 항상 이겨주던 베어스. 그리고 박철순. 응원하면 안 되지만 자이언츠 팬들 몰래 응원하던 그 시절의 야구는 지금 내 앨범 속에는 상처뿐인 영광이 아닌 롯데의 기억도, OB의 기억도 이제는 즐거운 추억만이 되어버렸다. 김민호, 정수근, 장원진, 권명철, 김상진이 너무 미웠지만 그가 있었기에 나는 베어스를 속으로나마 응원했고 지금은 팀에 구분 없이 당시의 선수들이 아직도 너무 그립다.

<사진-두산 베어스, 슈퍼스타 감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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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쿼터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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