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쿼터메인's mentalgame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전에 ,이미 그는 꽃이 되어 있었다.(上)

별을 쏘다. 2007/09/17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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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 우리는 당신의 그림자.

1992년 어느 날. 1984년의 영광을 다시 재현하듯, 금테안경의 한 선수가 마운드에서 거침없이 공을 뿌리고 있었다. 그것도 한 복판에, 타자들에게 덤벼보라는 듯이 겁 없이 그대로 꽂아 넣었던 그 대담함...염. 종. 석 바로 이 글의 주인공이 그 자리에 있었다. 지금은 그에게 에이스라는 칭호를 붙이는 이도 있을지도, 없을지도 모르지만, 최소한 뒤돌아 회상하면, 그는 분명 에이스가 맞다고 생각할 것이다. 우승에 목말라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1승에 목을 매던 부산 야구팬들에게 단비 같은 존재인 염종석은 그렇게 혜성처럼 나타났다.

“염종석이요? 최동원 이후 윤학길, 서호진, 김청수 모두 좋은 선수들이었죠. 그러나 저는 염종석이 좋습니다. 아니 부산 팬들에게는 전부였습니다. 많은 이들을 지켜봤지만, 염종석처럼 부산 시민들에게 시원함을 오랜만에 안겨주었던 선수가 있을까요. 염종석이 나오면 이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말 그대로 최고였습니다.”부산 출신의 민병덕(32) 씨는 그에 대한 기억을 그렇게 회상한다. 1992년 부산 팬들은 염종석이 등판하면 반드시 그 날은 이긴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야구선수 염종석의 봄이 시작되는 듯 했다. 최소한 1992년에는 그랬다. 방어율 1위, 다승 3위, 탈삼진 6위...부산 팬들에게는 믿기지 않는 1992년이었다. 신인 투수로 혜성처럼 나타나면서 방어율 1위를 따낸 그는 한동안 이어질 것이라고 전문가들이 예상하던 국보급 투수 선동렬의 방어율 타이틀 방어를 깬 대담한 신인이기도 하였다. 또한 당시 신인으로써의 17승은 1986년 센세이션 그 자체였던 18승을 거둔 청룡의 김건우 다음으로 좋은 승수로 주목받기에 충분했다. 구단 코칭 스탭진들 포함하여, 모든 전문가들이 예상하지 못한 선수가 말 그대로 리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내일 당장 은퇴를 선언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어보였던 치명적인 부상과 수술의 악순환. 그리고 이어지는 지루한 재활과정. 부상이란 이름의 악령은 마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다람쥐 바퀴를 미친 듯이 돌리는 다람쥐를 보는 것만 같았다. 염종석은 1992년 거둔 17승중에서 13번을 완투로 장식했고, 그 중 2차례는 9회까지 상대팀의 스코어보드에 0을 찍게 만들었다. 그리고 6번의 세이브는 보너스였다. 200이닝을 훨씬 넘기면서 전천후로 활약하던 그의 모습은 선발과 마무리라는 보직이 확실하게 자리 잡지 않은 당시 야구에서 아름답게 미화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이긴 하였다.

염종석은 팀을 우승으로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주역이었다. 하지만 그가 데뷔시즌이었던 1992년 이후 그 시절의 압도적인 모습은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는 롯데의 팀 이름처럼 10년이 넘게 마운드위에 우뚝 서 있을 것만 같은 자이언트로 보였다. 하지만 야구의 신은 이 거인의 괴력을 단 한 해만에 소진시켜 버렸다. 그가 마운드 위에 다시 서기까진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어렵게 돌아온 그는 더 이상 상대팀에게 공포감을 안겨다주는 자이언트가 아니었다. 그가 마운드에서 진짜 살아나기까지는 정말 오랜 시간이 걸린 것 같다.

신인들은 큰 경기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는데 소극적이기 쉽다. 그러나 염종석은 심장이 멎어버릴 듯한 게임등에서도 충분히 예외라는 티켓을 거머쥐고 있었다. 그가 특별함 그 이상으로 느꼈던 것은 당시 염종석을 감상하던 야구팬들이라면 기억할 것이다.

그는 1992년 준 플레이오프 1차전 9이닝을 2안타 3-0 완봉승으로 강팀 삼성라이온즈를 제압하는 것을 시작해서 명가 해태 타이거즈와의 플레이오프 1차전 3이닝 2안타 무실점 구원승,4차전 9이닝 6안타 4-0완봉승(21이닝 연속 무실점 기록),5차전 세이브를 거두면서 그가 92년 최고 선수 중에 왜 한명이었는가를 여실히 증명해 보인다. 그리고 한국시리즈 빙그레 이글스 전에서 4차전 선발승은 더 이상 그가 한 팀의 신인이 아니라, 팀내 기둥이었음을 다시금 증명하게 해주었다.


























그렇게 염종석은 그 자리에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1993년, 바로 문제가 되기 시작하는 시즌이 되었다. 견제 동작과 주자가 있을 당시 투구 폼, 상대방의 번트 공격시의 수비 자세에 대한 불안함, 그리고 볼 배합 등이 간파당하면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물론 계약금 관련으로 인한 훈련 양 부족, 혹사로 인한 구위저하도 그의 가슴에 상처를 주기에 충분했다. 1993년 투수분업이 확실하지 않은 시대였기에, 1992년과 동일하게 염종석은 마무리로도 간간히 그해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1993년 그가 그 해 거둔 7세이브는 당시 구원부문 8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다. 그리고 그 후, 염종석은 1993년 10승(10패)을 끝으로 06년까지 단 한 번도 두 자릿수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그에게 지금의 모습이 실망스럽다고 탓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염종석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의 스피드가 1992년의 그것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고 뭐라고 하는 이가 몇이나 있을까. 수차례의 수술로 프랑켄슈타인을 연상케 하는 그의 몸을 본 야구팬이라면 프랑켄슈타인의 흉칙한 외모를 보고 겁에 질려 도망갔던 사람들처럼 그를 경멸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차오르는 팬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사직에서 고향 분들의 응원을 업고 마운드에 오르는 기분이 어떤지 아십니까? 저는 사직이 좋습니다. 롯데를 떠나면 야구 그만해야죠.”


























염종석은 고교 졸업 후 명문 부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성대로 진학 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어머니께서 교통사고를 당하셨기에 그는 프로에 고민 없이 입단하게 되었다. 염종석은 마음이 부자인 선수였다. 염종석 본인도 원래는 어렸을 적에 팔꿈치 수술을 받았어야 했지만, 부상을 당하고 나서도, 제대로 된 약 한번 쓰지 못하고 지낼 정도로 어려웠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기에 부상 치료가 제대로 되지 않은 당시 팔의 각도를 지적받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고 한다. 팔을 다친 상태에서 병원에 가서 치료받을 비용이 없어서 그대로 방치해놓은 적도 있단다. 그러나 힘든 어린 시절만 보낼 줄 알았던 염종석은 강병철 감독의 눈에 들어서, 대박을 터뜨리게 된다.1992년 훈련만 하는 키가 큰 순둥이가  사건을 치기 시작했던 것이다.강병철 감독이 그의 인생에 각별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사직구장에 먼저 나와서, 훈련하는 것과, 밤늦게 남아서 훈련하는 것뿐입니다. 마운드에서요? 힘이 닿는 데까지 저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제 자신을 던져야겠지요.”

염종석이 신인시절, 어느 날 자신의 금테 안경을 만지면서 인터뷰를 했을 때 했던 이야기이다. 팬들은 그의 금테안경에서 8년 전인 1984년. 구도 부산에 한국시리즈 우승트로피를 안겨다준 최동원의 모습을 느꼈다. 롯데 구단에게 염종석은 특별한 존재였고, 팬들에게 염종석은 각별한 존재였다. 지난해 류현진이 나타나기 전까지 프로야구 26년 역사상 가장 인상 깊은 활약을 보인 고졸신인이었다. 고졸 신인 최다승(17승) 기록을 가지고 있던 그가 바로 염종석이었다. 1992년 서태지가 한반도를 뒤흔들며 등장했을 때, 부산에서는 염태지라는 신조어까지 만들게 했던 이가 바로 염종석이다. 그는 지금도 노장이 아니다. 롯데 팬들의 가슴속에는 항상 염종석이라는 거인이 영원히 공을 뿌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슬라이더 하나만큼은 나 또한 자부심이 있었다. 그러나 이 겁 없는 어린 친구를 보고, 내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어디서 저런 힘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선수시절 상대방 선수에게 특별한 멘트 없이 게임을 치르던 선동렬 現 삼성 감독이 92년 염종석의 공을 보고 인터뷰하던 멘트이다.85년부터 93년까지 국보 선동렬 감독이 선수로 뛰던 당시 방어율 타이틀에서 염종석에게 밀렸던 일은, 사건 아닌 사건이었다.92년 염종석은 신인왕과 골든글러브 타이틀을 동시에 거머쥐게 된다. 당시 국민타자이자 최고 타자이던 92년 MVP 장종훈의 엄청난 활약도 그 해 염종석의 광적인 부산 팬들의 인기에 묻히는 분위기도 간혹 감지되었다.

 <사진출처-롯데 자이언츠 홈페이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전에 ,이미 그는 꽃이 되어 있었다. 下편이 뒤에 이어집니다.

-데일리안, 네이버에 전송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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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쿼터메인